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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이야기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그는 누구인가?

by 민강사 2024. 9. 3.

 

흔히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 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그리고 필리핀 국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필리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필리핀 독립 투쟁을 함께 했던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와 안토니오 루나(General. Antonio Luna) 장군의 처형을 아기날도가 지시한 것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지만 그에 반한 논란이 끊이질 않는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1964)

 

필리핀 독립운동가, 정치인. 필리핀 비밀 무장 독립 투쟁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의 카비테(Cavite) 지역 지휘관으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 투쟁을 하였다. 1899년 필리핀 루손섬 말로로스(Malolos)에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 이후 미국에 대항해 독립 투쟁을 하다 1901년 미국에 체포되어 정계에서 은퇴함. 카티푸난에서 동지였던 보니파시오와 그의 부하 였던 안토니오 루나 장군의 처형 지시를 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많은 인물임.

 

보니파시오,아기날도,루나장군
좌:보니파시오, 중:아기날도, 우:루나 장군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어린 시절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69년 필리핀 루손섬 카비테(Cavite) 지역의 부유한 중국계 필리핀인 가문(아버지는 필리핀 사람, 어머니는 중국계 필리핀 사람)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그 지역의 주지사였기에 어린 시절은 부유하게 살았지만, 아버지를 9살 때 여의게 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산토 토마스 대학교(University of Santo Tomas)를 졸업합니다. 그 당시 필리핀에서 금서였던 호세 리잘(Jose Rizal)의 스페인 필리핀 식민 지배 현실을 비판한 소설 "나에게 손대지 말라(Noli me Tangere)"를 읽고 감동받아 호세 리잘이 설립한 필리핀 민족 동맹(La Liga Filipino)에서 사회 개혁 운동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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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날도는 고향 카비테(Cavite)의 작은 마을에서 공무원으로 일하였는데, 1895년 카비테 지역의 지방 관리자(Municipal Govenor-Captain)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1895년 아기날도는 스페인 식민 당국이 임명한 지역 공무원이었음에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만든 필리핀 무장 독립 투쟁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에 합류하면서 카비테 지역 지부의 수장이 됩니다. 그리고 1896년 8월 29일 필리핀 전역에서 카티푸난의 필리핀 독립 혁명이 시작되면서 아기날도도 혁명에 참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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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독립 혁명에 참가

 

카티푸난의 총사령관이었던 보니파시오와 다른 지역의 카티푸난이 스페인 군대와의 전투에서 계속 밀리면서 퇴각을 했던 반면에 아기날도가 이끌었던 카티푸난은 카비테 지역에서 스페인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총사령관이었던 보니파시오는 잇따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보니파시오에 대한 신망이 사그라들며 결국 카티푸난에 내분과 파벌이 생기게 됩니다.

특히 카비테 지역에서 승승장구하던 상류층 유력 가문 출신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의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카티푸난의 내분과 당파싸움은 더 커지게 됩니다. 결국 카티푸난은 내분과 당파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 1897년 3월 아기날도의 근거지 카비테에서 테헤로스 회의(Tejeros Convention)를 개최하고 카티푸난의 새로운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를 하게 됩니다.

이 선거에서 아기날도는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이 됩니다. 이에 보니파시오는 그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새로운 정부를 만들 계획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알아차린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생을 체포하고 반란 및 폭동 선동죄 명목으로 1873년 5월 10일에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생을 처형하게 됩니다. 

보니파시오의 처형 결과 카티푸난의 내부 조직력이 크게 와해되었습니다. 아기날도가 승승장구하던 카비테(Cavite) 지역마저 스페인 군대에게 크게 패해 카티푸난은 마닐라 북부 불라칸(Bulacan) 지방 산간지역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수세에 몰린 아기날도와 그의 혁명 정부는 1897년 12월 스페인 식민 당국과 항복 협상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카티푸난의 혁명 정부를 해산하고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가는 것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법적 사면 조치를 받고 80만 멕시코 달러(나중에 무기 구매에 사용)의 돈을 받게 되었고, 추가로 필리핀에 남아 있는 카티푸난 조직원들에게 법적 사면 조치와 90만 멕시코 달러를 지급하기로 하였으며,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사회 개혁을 약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 당국은 약속을 어기고 필리핀 내에 있던 카티푸난 조직원을 색출하고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에 필리핀에서 카티푸난의 무장 투쟁은 다시 시작 되게 됩니다.

 

미국-스페인 전쟁

 

1898년 4월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을 돕기로 하고 그해 5월에 필리핀으로 돌아와 스페인에 대항해 무장 투쟁을 다시 시작합니다. 1898년 6월 12일에 아기날도는 필리핀 카비테에서 필리핀의 국기와 국가를 선보인 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자신들만의 필리핀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후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1898년 12월 파리조약(Treat of Paris)에 의거해 스페인은 2,000만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스페인의 식민지 였던 필리핀과 괌, 팔라우, 푸에르토리코 등의 통치권을 미국에 넘기게 됩니다.  그렇게 330여 년간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지배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이 물러났기 때문에 진정한 독립이 올 거라 기대했지만 세계 정세를 너무 몰랐습니다. 1898년 아기날도가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당시 미국 3만 명의 병사가 필리핀에 상륙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미국 헌법을 꼼꼼히 봤는데 거기에는 식민지를 두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니 미국을 겁낼 필요가 없다" 라고. 아기날도는 미국을 도와 스페인을 필리핀에서 몰아내 주면 필리핀에게 미국이 독립을 선물해 줄 거라고 믿었던 겁니다.

 

 

필리핀 초대 대통령 그리고 필리핀-미국 전쟁

 

미국이 필리핀의 통치권을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은 것을 몰랐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9년 1월 루손섬 말로로스(Malolos)에서 필리핀 제1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을 필리핀 연방의 마누엘 케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에 취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은 필리핀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화력에서 열세였던 필리핀 군은 게릴라 전술 등을 펴서 선전을 했지만 결국 미국에 패하게 됩니다.  2년간의 전쟁으로 60만 명 이상의 필리핀 사람들(민간인, 군인 포함)이 사망하게 됩니다. 

결국 1901년 3월 아기날도는 미군에 생포되었고, 4월 1일 아기날도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항복을 하고 더 이상 무장 독립 투쟁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인 카비테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기날도가 미군한테 생포된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평생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고, 아기날도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미국과의 투쟁을 중지하고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물러나면서 필리핀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고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가 시작됩니다. 아기날도는 결국 스페인과 미국 모두에게 속았던 것입니다. 아기날도가 퇴장했지만 남아있던 카티푸난의 지도자들은 임시정부를 구성해 1912년까지 미국에 저항하게 됩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대한 평가

 

고향 카비테에서 조용히 은둔해 있던 66세의 아기날도는 1935년 필리핀을 미국의 한 개의 주로 인정하는 필리핀 연방(Philippines Commonwealth)이 생기면서 필리핀 연방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마누엘 케손(Manual Quezon)에게 큰 차이로 패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 아기날도는 일본군에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이 후원하는 필리핀 국가 평의회에서 필리핀과 미국이 일본에 반대하지 말고 협력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역자로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지만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엘피디오 키리노(Elpidio Quirino) 대통령은 아기날도의 명예 회복 차원에서 필리핀 국가 평의회(Council of State) 위원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62년 필리핀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대통령은 필리핀 국경일인 독립 기념일의 날짜를 바꾸게 됩니다. 실제 독립 기념일이며 그 당시까지도 매년 국경일이었던 7월 4일에서, 아기날도가 필리핀 제1공화국을 선포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던 6월 12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까지도 국경일 로서의 필리핀 독립기념일은 매년 6월 12일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마카파갈 대통령의 아버지가 보니파시오를 처형했던 아기날도의 최측근이었던 라자로 마카파갈(Lazaro Macapagal) 장군입니다. 

아기날도는 1964년 2월 6일, 94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필리핀에 아주 복잡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아기날도가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길고 힘든 투쟁을 했던 사실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기날도의 행적에 관한 끊임없는 논란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로부터 호세 리잘이나 보니파시오처럼 필리핀 독립의 영웅으로 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카티푸난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처형하였고,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필리핀군 총사령관이었던 전쟁 영웅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1866~1899) 장군을 석연 찮은 이유로 암살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협력했습니다.

 

[필리핀 역사 이야기] - 필리핀의 전쟁 영웅 안토니오 루나 장군

 

필리핀의 전쟁 영웅 안토니오 루나 장군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필리핀의 전쟁영웅 안토니오 루나 장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1866~1899)  필리핀의 군인, 화학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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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날도는 오늘날 필리핀의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정신의 상징으로 종종 알려져 있지만, 그의 2년간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필리핀 제1공화국, 1899~1901)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였다는 것이 필리핀 대다수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이상으로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관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