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에서는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필리핀의 전쟁영웅 안토니오 루나 장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안토니오 루나(Antonio Luna. 1866~1899)
필리핀의 군인, 화학자, 전쟁 전략가, 약사. 성격이 불같았고 원칙주의자였던 필리핀 장군으로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필리핀군 총사령관이었다. 필리핀 초대 대통령 아기날도에 의해 암살되었다.
어린 시절과 스페인 유학 시절
안토니오 루나는 1866년 필리핀 마닐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여러방면에 재능이 있던 루나는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 대학교(University of Santo Tomas)에서 화학, 음악, 문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로 유학을 가 약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랑스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세균학을 공부했습니다. 스페인 유학 시절 안토니오 루나는 호세 리잘(Jose Rizal)과 친구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필리핀 독립 혁명에 참가
1894년 스페인 유학을 마치고 필리핀으로 돌아온 안토니오 루나는 마닐라에 있는 시립 연구소의 수석 화학자가 됩니다. 이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가 만든 필리핀 비밀 결사 무장 독립 투쟁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이 합류 제안을 하지만 거절합니다.
당시 필리핀의 상류층이었던 안토니오 루나는 카티푸난의 필리핀 식민 지배에 대한 폭력적인 혁명보다는 호세 리잘이 주장했던 평화적인 방법의 필리핀 사회 개혁을 원했습니다.
여하튼 안토니오 루나는 1896년 카티푸난에 연루 되었다는 명목으로 스페인 식민 당국에 체포됩니다. 그 후 스페인으로 추방되어 마드리드의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렇게 스페인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추방 되 감옥에 수감된 안토니오 루나에게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지배 통치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 태도의 변화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1896년 12월 30일 안토니오 루나의 친구였던 호세 리잘이 반란, 폭동 선동, 내란 모의 죄로 스페인 식민 당국에 의해 공개 처형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토니오 루나는 필리핀 독립 혁명에 참여해 스페인에 무력으로 저항할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스페인 감옥에서 풀려난 안토니오 루나는 벨기에로 가 유명한 군사 교육자인 제랄드 레만(Gerard Leman)으로부터 게릴라 전술, 군사 조직, 야전 요새화 방법 등에 관한 군사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 후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전 홍콩에 들러 필리핀 혁명의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당시 홍콩에서 망명 중)를 만나 의기 투합합니다.
[필리핀 역사 이야기] - 필리핀 독립의 아이콘 호세 리잘의 민족주의 개혁 운동
필리핀-미국 전쟁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게 됩니다. 패한 스페인 군대가 필리핀에서 철수할 준비를 할 때 필리핀 혁명군이 마닐라를 포위합니다. 새로 장교로 부임한 안토니오 루나는 미군이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필리핀 혁명군과 미군이 마닐라를 함께 점령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마닐라 내부로 진입할 추가 병력을 요청하지만 아기날도는 이를 거절합니다.
아기날도는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적당한 시기에 마닐라를 필리핀 혁명군에게 인계할 거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기날도의 믿음과는 다르게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 달러를 주고 양도받은 필리핀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기날도는 1898년 9월 안토니오 루나를 육군 준장으로 진급 시키고 그를 전쟁 작전 책임자(Chief of War Operations)로 임명합니다.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필리핀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필리핀 혁명군을 제대로 훈련 시키려고 노력 합니다. 필리핀 사관학교의 운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필리핀 군에도 체계적인 군사 훈련 및 군사 조직이 도입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결국 1899년 2월 필리핀과 미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치열히 싸워 일정 부분 전과가 있긴 했지만 조직적이고 전술에 능한 미군에게 계속 밀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기날도의 친위대 격인 카비테(Cavite)의 부대가 아기날도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이라며 루나 장군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잦아지게 됩니다.
참다 참다 결국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아기날도를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루나 장군이 필요했던 아기날도는 수용하지 않고 그를 필리핀 군 총사령관으로 진급 시킵니다.
같은 편 끼리의 음모와 암살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참모들로부터 다른 장교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장교들은 대부분 루나 장군의 엄격하고 권위적인 스타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그들 대부분이 안토니오 루나 장군으로부터 징계를 받거나 무장해제를 당한 장교들이었습니다.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아기날도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믿었던 탓일까요. 결국 아기날도에게 뒤통수를 맞고 맙니다. 1899년 6월 아기날도로 부터 전보를 받고 루나 장군은 필리핀 혁명 정부의 새 내각이 구성되고 있는 루손섬 중앙 지역인 누에바 에시하(Nueva Ecija)의 카바나투안(Cabanatuan)으로 가게 됩니다.
1899년 6월 5일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25명의 부하들과 카바나투안으로 가던 중 일행의 마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부하 2명과 함께 카바나투안에 먼저 도착합니다. 그리고 루나 장군은 혼자 새 내각의 본부 건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기날도를 비롯해 아무도 없었고 루나 장군과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내각의 각료 혼자 있었습니다. 그 각료로부터 회의는 취소되었고 아기날도 대통령은 이미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이때 갑자기 총성 한 발이 울리자 루나 장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이미 아기날도의 호위부대 군인들 여러 명이 루나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아기날도의 호위부대 군인들에게 칼로 찔리고 총에 맞아서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33세였습니다. 함께 왔던 루나 장군의 부하 2명 중 한 명은 아기날도의 호위부대 군인들 총에 맞아 죽고, 다른 한 명은 심하게 다친 채로 제압 당합니다.
안토니오 루나 장군이 아기날도의 호위부대 군인들에게 칼로 찔리고 총에 맞아 암살을 당할 때, 아기날도는 안토니오 루나 장군의 측근인 베나시오 콘셉시온(Venacio Concepcion) 장군의 부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나 장군의 부하 장교들과 부대를 해산 시킵니다.
지금까지 안토니오 루나 장군의 암살을 누가 지시했는지에 관해 논란이 많은데 대부분의 필리핀 역사 학자들은 아기날도의 승인 없이는 루나 장군의 암살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루나 장군이 암살되고 약 1년 9개월 후 수세에 몰린 필리핀 혁명군은 미국에 항복을 하게 되고, 미군에게 생포된 아기날도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낙향해 은둔 생활을 합니다.
이상으로 필리핀의 전쟁 영웅 안토니오 루나 장군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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