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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이야기

필리핀의 초대 총리였던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by 민강사 2024. 9. 5.

 

필리핀에서 많이 사용되는 동전 중 하나가 10페소입니다. 그 10페소 동전 앞면에 도안되어 있는 인물이 필리핀의 초대 총리였던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입니다. 그만큼 필리핀의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높게 평가받고 있고, 필리핀 국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Apolinario Mabini. 1864~1903)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 현대 헌법의 초안자 이자 작성자. 필리핀 제1 공화국 초대 총리(Prime Minister, 1899년 1월~5월)를 역임. 강력한지성, 정치적 노련함, 달변가로 유명했던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혁명의 두뇌(Brain of the Revolution)' 로 불리고 있다. 1903년 콜레라에 걸려 3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필리핀의 초대 총리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10페소 동전
필리핀의 초대 총리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10페소 동전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어린 시절

 

1864년 필리핀 루손섬 남쪽 바탕가스(Batangas)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비니는 어릴 적부터 총명했습니다. 가정부와 재단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고향에서 고등교육을 힘겹게 마쳤습니다. 이후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University of Santo Tomas)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마비니는 산토 토마스 대학 재학 시절 필리핀의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를 위해 법조계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는 학업과 법률 사무원, 법원 직원으로 일을 병행하면서 6년 만에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습니다. 

 

마비니의 사회 개혁 운동과 소아마비 발병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호세 리잘(Jose Rizal)이 주도했던 평화적인 사회 개혁 운동에 동참을 합니다. 이 사회 개혁 운동은 필리핀의 스페인 지배에 대한 완전 독립을 주장한 것은 아니고, 스페인 식민 지배의 모순과 폐해를 평화적 방법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호세 리잘이 중심이 된 사회 개혁 운동은 주로 필리핀 중상류층 사람들이 지지를 했습니다. 반면 필리핀의 하층민들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가 설립한 급진적인 카티푸난(Katipunan) 활동에 더 많은 참여를 했습니다. 카티푸난은 스페인 식민 당국으로부터 필리핀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 저항했던 비밀 결사 독립 투쟁 단체입니다.

이후 마비니는 변호사가 돼 활발히 사회 개혁 운동 활동을 합니다. 그러던 1896년 마비니는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 마비가 됩니다. 그 이후 쭉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비니의 하반신 마비 장애가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스페인 식민 당국은 사회 개혁 운동을 하던 마비니를 체포하여 한 병원에 가택 연금을 시킵니다. 이 무렵 한 가지 큰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이미 스페인 식민 당국에 체포되 감옥에 있던 호세 리잘이 1896년 12월 30일 반란, 폭동 선동, 내란 모의 죄라는 누명을 쓰고 공개 처형됩니다.  마비니는 결국 자신의 하반신 장애 때문에 가택 연금중이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독립 혁명과 정부의 제도적 기초 수립

 

호세 리잘의 공개 처형은 결국 필리핀 사람들의 가슴에 독립 의지를 불타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마비니도 호세 리잘의 처형에 영향을 받아  평화적인 사회 개혁보다는 좀 더 급진적인 방법으로 필리핀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고, 이에 그 방법론으로 필리핀 독립 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필리핀 역사 이야기] -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

우리나라에 항일 독립군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1889~1930)이 있었다면 필리핀에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 1863~1897)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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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1896년에 일어난 카티푸난의 필리핀 독립 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포트를 합니다. 특히 1898년 4월 마비니가 작성해 발표한 스페인-미국 전쟁에 대한 성명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비니는 그 성명서에서 스페인과-미국 간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하게 되면 필리핀을 미국에 양도할 것이라고 필리핀 혁명 지도자들에게 경고를 했으며,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필리핀 독립 혁명군 장군이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는 마비니의 성명서에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 당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스페인 식민 당국과 항복 협상을 하고 홍콩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기날도는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 상황을 틈타 미국을 돕기로 하고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와 스페인에 대항해 무장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필리핀 혁명 정부의 핵심 참모이자 조언자로 자신의 곁에 두게 됩니다.

 

 

[필리핀 역사 이야기] -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그는 누구인가?

 

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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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혁명 정부에서 아기날도의 대통령령과 같은 대부분의 문서를 작성했으며, 지방의 조직, 사법 제도, 경찰 시스템 등에 대한 정책을 입안했습니다. 이후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됩니다. 마비니는 이런 역할들을 하면서 제1 필리핀 공화국의 첫 번째 헌법 초안 작성에 큰 기여를 합니다. 

 

필리핀-미국 전쟁

 

1899년 1월 마비니는 필리핀 제1 공화국의 총리 겸 외교부장관(Prime Minister & Foreign Minister)으로 임명되면서 빠르게 승진을 합니다. 이후 그는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과 필리핀의 운명에 대해 협상을 시작합니다.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필리핀의 자치권 인정과 미국과의 휴전을 협상하려 했지만 결국 미국은 협상을 거절합니다. 이에 좌절한 마비니는 결국 미국과 전쟁을 하자는 쪽으로 지지를 하며 아기날도의 정부에서 모든 직을 사임합니다. 그리고 1899년 6월 2일 아기날도는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1899~1901)에서 필리핀은 화력의 열세와, 특히 군사 전략적으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미국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하며 루손섬 북쪽으로 퇴각합니다. 그러다 마비니는 1899년 12월 미군에게 생포 되고 마닐라의 포로수용소에서 전쟁 포로 생활을 합니다.

1901년 1월 마비니는 석방되지만, 다시 미국을 비판하는 신문기사를 게재하고 미국에 충성 맹세를 거부합니다. 미국인들에게 다시 체포된 마비니는 결국 괌(Guam)으로 추방됩니다. 2년간의 괌 유배생활 동안 마비니는 자신의 회고록인 "La Revolucion Filipina(필리핀 혁명)"를 집필합니다. 그리고 결국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마비니는 어쩔수 없이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는데 동의합니다.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사망과 유산

우여곡절 끝에  2년간의 괌 유배 생활을 마치고 1903년 2월 마비니는 필리핀으로  돌아옵니다.  미국에 충성을 맹세한 마비니였지만 필리핀의 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쓰고 연설을 합니다. 하지만 몸이 많이 쇠약해진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는 당시 필리핀에 만연해 있던 콜레라에 걸려 1903년 5월, 38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사망합니다. 
필리핀 독립의 영웅인 호세 리잘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마찬가지로 아폴리나리오 마비니도 그의 40세 생일을 보지 못하고 결국 사망합니다. 그러나 마비니의 길지 않았던 시간 동안 필리핀 혁명정부의 기초 수립 기반을 닦고 필리핀의 체계적인 미래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필리핀 페소화 10페소 동전 앞면에 마비니를 도안해 놓았고, 루손섬 남부 바탕가스(마비니의 고향)의 마비니(Mabini)란 지역명도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이상으로 필리핀의 초대 총리였던 아폴리나리오 마비니에 대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