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항일 독립군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1889~1930)이 있었다면 필리핀에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 1863~1897)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 1863.11.30~1897.5.10)
필리핀 독립운동가이자 필리핀 독립의 영웅. 필리핀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평민 혹은 필리핀 독립 혁명의 아버지라 부름. 필리핀 비밀 무장 독립 투쟁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 KKK)의 창설자이자 지도자로 스페인 식민 지배로부터의 독립 혁명을 주도함. 카티푸난 내 당파 싸움에서 밀려 34세의 나이에 동지들에게 처형 당한다.
보니파시오의 어린 시절
1863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마닐라 톤도(Tondo) 지역의 평범한 가정에서 6남매의 첫째로 태어나게 됩니다. 일찍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보니파시오는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낮에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미국 대통령 위인전 등의 책을 읽고 독학으로 스페인어, 프랑스 혁명, 필리핀의 법률 등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하고 글 쓰는 연습을 합니다.
이렇듯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과 가족을 챙길 줄 아는 책임감 그리고 남을 위한 이타심에 일찍 눈을 뜨게 됩니다.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보니파시오는 어릴 때부터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지배에 대한 부당함과 모순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니파시오의 카피푸난 창설
1892년 보니파시오는 호세 리잘(Jose Rizal)이 만든 필리핀 민족 동맹(La Liga Filipina)에 참여하여 활동 하게 됩니다. 이후 스페인 식민 당국에 의해 호세 리잘이 석연 찮은 이유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로 유배를 가게 되자,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무장 독립 투쟁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 KKK)을 창설하게 됩니다.
☞ 필리핀 민족 동맹(La Liga Filipina. 1892)
호세 리잘이 만든 단체로 평화적인(비폭력) 방법으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지배 체제의 개혁을 요구했던 단체. 궁극적으로 개혁에는 실패함.
그 당시 필리핀에서 여유가 좀 있고 살만했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과 독립운동가 들은 호세 리잘이 추구했던 평화적인 개혁에 지지를 보냈고, 가진 거 없고 가난했던 대부분의 서민과 급진적인 독립운동가 들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무장 독립 투쟁을 지지했습니다. 이렇듯 필리핀의 못 살던 서민들이 주축이 된 카티푸난은 빠르게 필리핀 전역의 여러 지역에 지부를 설립하게 됩니다.
☞ 카티푸난(Katipunan, KKK. 1892)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창설한 필리핀 비밀 결사 무장 독립 투쟁 단체. 원래 카티푸난이란 말은 스페인어로 비밀 결사 단체를 의미하는데, 보니파시오가 창설한 카티푸난은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필리핀 비밀 결사 무장 투쟁 단체를 말한다. 필리핀어로 공식 명칭(Kataastaasang Kagalann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 전국의 어린이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협회)의 줄임말로 "KKK"라고도 부른다.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을 통해 "칼랴얀(Kalayaan, 자유)" 이라는 신문을 발행해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필리핀 독립의 의지를 고취 시키는 글과 기사를 싣고 필리핀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은밀하게 포섭하는 활동을 합니다. 그 결과 1892년 루손섬 일부 지역에서 약 300여 명의 인원으로 시작했던 카티푸난이 필리핀 전역으로 퍼져 1896년 3만 명 이상의 규모로 커지게 됩니다. 그렇게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필리핀 독립 혁명
드디어 1896년 8월 23일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혁명 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포함과 동시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 대통령과 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8월 28일 필리핀 전 지역에 있는 카티푸난 지부에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동시에 일어나 스페인 군대를 공격하라"라는 지령을 전달하고 카티푸난의 무장 봉기를 선언합니다. 그렇게 1896년 8월 29일 필리핀 전역에서 카티푸난의 필리핀 독립 혁명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야심 차게 준비한 필리핀 독립 혁명이 시작되었지만,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카티푸난은 스페인 정규 군대와의 전투에서 작은 승리가 몇 번 있긴 했지만 계속 패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훗날 보니파시오의 라이벌이 되는 루손섬 카비테(Cavite) 지역의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지휘하는 카티푸난은 전과가 좋았습니다. 1896년 12월 30일 호세 리잘이 반역죄로 스페인 당국에 의해 공개 처형되자 보니파시오는 호세 리잘의 원수를 갚겠다며 혁명 투쟁을 계속해 나가게 됩니다.
☞ 더 알아보기 : 필리핀 독립의 아이콘 호세 리잘의 민족주의 개혁 운동
연이은 전투의 패배로 보니파시오는 루손섬 북쪽 몬탈반(Montalban)까지 밀리게 되며 카티푸난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산악 지역으로 후퇴하고 게릴라 전술을 펴며 스페인 군대에 저항 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약 30회의 스페인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되었고 결국 카티푸난에 내분과 파벌이 생기면서 조금씩 신망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카비테(Cavite) 지역에서 승승장구하던 상류층 유력 가문 출신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의 리더쉽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카티푸난의 내분과 당파싸움은 더 커지게 됩니다.
카티푸난의 내분과 보니파시오의 처형
결국 카티푸난은 내분과 당파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 1897년 3월 아기날도의 근거지 카비테(Cavite)에서 테헤로스 회의(Tejeros Convention)를 개최하고 카티푸난의 새로운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를 하게 됩니다.
이 선거에서 아기날도가 카티푸난의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내무부 장관에 지명이 됩니다. 이후 아기날도는 1899년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에서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필리핀 역사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까지 논란이 많은데, 테헤로스 회의에서 치러졌던 카티푸난의 대통령 선거에서 돈 많은 유력 가문 출신의 아기날도가 선거 조작을 해 당선되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보니파시오는 부정 선거라 주장하며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의 대통령 당선과 테헤로스 회의의 모든 내용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부를 만들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를 알아챈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와 그의 측근들을 체포하게 됩니다.
1897년 5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아기날도 측 재판관 들로만 구성된 엉터리 재판에서 반란 및 폭동 선동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5월 10일 마라곤돈(Maragondon, Cavite)의 분티스산(Mt. Buntis)에서 그의 동생과 함께 처형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다음 해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생 시신이 수습되지 않고 방치 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보니파시오가 처형 당하고 그의 부인이 1달 동안 분티스 산속에서 그의 시신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후에 그 가슴 아픈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가 되어 "위대한 행방 불명자" 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보니파시오의 처형 이후
보니파시오의 처형 이후 아기날도에게 염증을 느낀 많은 카티푸난의 지휘관들이 이탈 하게 되고, 통합된 명령 체계가 붕괴되면서 카티푸난은 전국적인 조직에서 점조직과 같은 모래알 조직이 되게 됩니다. 단 아기날도가 이끌던 카비테(Cavite) 지역의 카티푸난은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가 된 후 미국에 저항 하다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보니파시오가 처형 당하고 약 50년 후인 1946년에 필리핀은 진정한 독립을 하게 됩니다. 필리핀의 독립 이후 보니파시오가 재평가되면서 필리핀의 독립 영웅이자 독립의 아버지 그리고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로 추앙받게 됩니다.
필리핀의 일부 소수의 역사학자들은 필리핀 최초의 대통령은 흔히 알고 있는 아기날도가 아닌 보니파시오이고, 필리핀 최고의 독립 영웅도 호세 리잘이 아닌 보니파시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카티푸난 내에서의 보니파시오와 아기날도의 권력 싸움은 필리핀의 상류층을 대표하는 아기날도가 서민층을 대표하는 보니파시오를 제압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카티푸난을 창설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필리핀 당파주의의 최대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당파주의란 대의명분이나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의를 말합니다.
2007년 필리핀의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은 보니파시오의 생일인 11월 30일을 보니파시오의 날(Bonifacio Day)로 지정합니다. 보니파시오의 날은 필리핀의 국경일로 매년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보니파시오를 처형했던 아기날도의 최측근 이었던 라자로 마카파갈(Lazaro Macapagal) 장군이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카티푸난의 내분과 당파싸움으로 어이없게 처형 당하지 않았더라면 필리핀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합니다.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국민들에게 호세 리잘과 비슷한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호세 리잘 보다 필리핀의 독립에 실질적으로 더 기여한 보니파시오의 이야기가 가슴에 더 와닿는 거 같습니다.
이상으로 필리핀 독립 혁명의 지도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에 관한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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