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마젤란이 대항해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젤란 2편, 마젤란 미지의 서쪽 항로를 개척하다란 주제로 포스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마젤란 미지의 서쪽 항로를 개척
스페인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결과로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해상 항로를 이용해서 스파이스 아일랜드(Spice islands, 향신료 제도,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이 못 가게 막은 겁니다. 이에 스페인은 새로운 향신료 무역 항로를 개척하려고 하던 중 마젤란이 딱 좋은 타이밍에 스페인 왕실에 흥미로운 제안을 하게 됩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선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스파이스 아일랜드(말루쿠 제도)에 가본 경험이 있었고, 동남아시아의 바닷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왕실에 대서양 서쪽 항로 개척에 관한 제안을 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전에 다녔던 뱃길이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항해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유럽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한 거 같습니다. 물론 성공을 하게 되면 향신료 무역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가 따라오는 것이었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이런 무모한 항해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이런 미지의 항로에 대한 확신에는 일찍이 먼저 스파이스 아일랜드에 가 있던 포르투갈 출신, 마젤란의 사촌이자 친구였던 프란시스코 세라오(Francisco Serrao)와의 오랜 시간 교류를 통한 정보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수시로 마젤란과 서신 교환을 통해서 스파이스 아일랜드의 향신료 동향과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세라오도 마젤란을 스파이스 아일랜드에서 애타게 기다리다가 결국 마젤란이 사망하는 같은 해인 1521년에 마젤란과 재회를 하지 못하고 정적들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대서양 서쪽으로의 신항로 개척과 스파이스 아일랜드의 향신료 무역에 관한 엄청난 PT에 만족한 스페인 왕실에서는 마젤란을 후원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젤란에게 5척의 범선(갤리온, Galleon)과 선원 및 군인 265명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1519년 8월 10일 스페인의 세비야 인근에 있는 산루칼(Sanlucar de Barrameda) 항구에서 대서양 서쪽으로의 미지의 항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마젤란이 스페인 왕실로부터 개런티를 받은 게 아주 대박입니다. 항해 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 보장, 항해 후 수익금의 20% 분배 보장 등등. 이러니 목숨을 걸고 항해를 시작했던 거 같습니다.
유럽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위대한 항해였지만 아시아 사람 특히 필리핀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게 위대한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마젤란이 필리핀 세부에 우여곡절 끝에 오게 되고, 필리핀이란 지역이 나중에 스페인에 알려지면서 궁극적으로 아주 오랜 시간(약 330년) 동안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었기 때문입니다.
마젤란 태평양을 발견
그렇게 1519년 8월 10일 스페인에서 출항한 마젤란의 함대는 대서양을 남하하여 서쪽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며 1519년 12월경에 남아메리카의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 하였으며, 1520년 1월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우루과이 인근에 있는 라플라타강 근처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게 되는데, 그때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포르투갈 출신의 대장 마젤란에게 앙심을 품은 스페인 출신 함장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마젤란은 휘하 선원들을 잘 지휘하여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하게 됩니다.
그 뒤 1520년의 대부분을 남아메리카 연안에서 더 큰 바다로 갈 수 있는 해협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냈고, 1520년 말에 드디어 마젤란 해협(Strait of Magellan)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젤란 해협이란 남아메리카 칠레 남부와 티에라 델푸에고 제도 사이에 있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해협입니다. 마젤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마젤란의 함대 중 빅토리아호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는 빅토리아 해협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주 위대한 발견이었지만 피해도 컸습니다. 그 와중에 배 한 척은 난파되었고 한 척은 스페인 본국으로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남은 배 세 척으로 마젤란은 드디어 태평양에 진입하게 됩니다.
여하튼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기까지 정말 갖은 고생을 다 해서 항해를 했던 마젤란은 유럽인이 처음 보는 바다인 태평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바다가 너무 잔잔하고 고요해서 이름을 스페인어로 "Mar Pacifico(잔잔한 바다)"라고 명명합니다. "Mar" 은 바다란 의미이고 "Pacifico"는 잔잔한 고요한 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마젤란이 유럽인 최초로 발견한 태평양의 이름을 작명 했습니다. 영어로 태평양이 The Pacific 인데요. 이 단어의 의미가 태평양이라는 뜻도 있지만, 잔잔한 고요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태평양에 진입한 뒤 마젤란은 태평양이 그렇게 큰 바다인지를 미처 몰랐기 때문에 계속 서쪽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다행히 큰 태풍이나 풍랑을 만나지 않아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었지만 약 4개월간의 태평양 항해 동안 무인도를 포함해 섬을 단 한 군데도 발견을 못 했고, 굶주림과 괴혈병과의 사투를 벌이는 등 거의 지옥과도 같은 항해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평양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가까스로 1521년 3월에 지금의 마리아나 제도인 우리나라 분들도 많이 놀러 가는 괌섬에 상륙을 하게 됩니다.
마젤란 괌(Guam)을 발견
태평양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거의 죽다 살아난 마젤란과 그의 부하들은 아주 오랜만에 육지에 상륙해서 물자도 보급받고 장비들을 정비했습니다. 그러던 중 괌 원주민들이 마젤란 함대의 소형 보트를 훔쳐 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문제로 원주민들과 다툼을 벌이다가 부랴부랴 괌섬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젤란은 괌섬의 이름을 도둑들의 섬 "Ladrones(스페인어로 도둑들) Islands"라고 지어 줬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지금의 괌(Guam)은 괌 원주민 말 중 'Guaham'으로 부터 유래된 것인데요, 이 말은 "없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괌 원주민 족장이 "우리 부족 중에는 도둑이 없다"라고 마젤란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괌의 섬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제가 괌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괌에 가실 일이 있으면 거기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젤란 함대가 괌을 떠나고 약 한달 뒤인 1521년 4월 7일에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필리핀 세부섬 이었습니다. 위의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마젤란의 최초 목적지는 스파이스 아일랜드(지금의 말루쿠 제도)였는데 필리핀 세부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갔더라면 스파이스 아일랜드에 바로 도착을 했을 건데....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만약 마젤란이 괌에서 항로를 서남쪽으로 가지 않고 서북쪽으로 갔다면 그 당시 조선에 마젤란이 왔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이요.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했으니 임진왜란 발발 전 약 70년 전 조선이겠네요. 그럼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마젤란 미지의 서쪽 항로를 개척 한 것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마젤란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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