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포스팅에서 필리핀의 선사시대 역사와 고대역사에서 알아보았듯이, 필리핀에는 여러 토착 국가 들과 바랑가이 연합체로 구성된 부족 국가들이 각자의 세력을 견제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6세기 초에 필리핀 역사를 극적으로 변화 시켜 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스페인 사람들의 필리핀 입성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리핀의 역사 중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배 시대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마젤란의 필리핀 도착과 사망(1521년)
16세기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향신료(계피, 정향, 육두구 등)를 획득하기 위해 지금의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인도네시아어로는 말루쿠 제도, 그 당시 유럽 사람들은 향신료 제도[Spice Islands]라고 불렀음.)로 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그 당시 향신료 1kg의 가격이 황금 1kg의 가격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이에 유럽인 들은 아시아에서 구한 향신료를 유럽에 가져가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항해를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대항해 시대도 다 돈 때문이었네요.
스페인 황실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 태생의 마젤란과 그의 선원들이 스페인 본국을 떠나 약 1년 8개월의 힘든 항해를 거쳐 1521년에 필리핀 세부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역사 적인 사건이 발단이 되어 마젤란과 필리핀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약간 오해가 있는 부분이 마젤란은 결코 필리핀을 침략해서 정복하겠다는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원래의 목적지인 몰루카제도(향신료 제도)에 도착을 못 하고 필리핀에 왔다는 것입니다. 필리핀 역사에서 마젤란의 향신료 탐사 항해와 막탄섬 왕 라푸라푸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고 내용이 방대해서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시리즈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1480? ~ 1521)
16세기 초 포르투갈 태생의 스페인 항해가 탐험가. 인류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 마젤란 해협과 태평양,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등을 유럽인 최초로 발견하고 명명하였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낸 사람.
약 1년 8개월간의 힘든 항해 끝에 마젤란과 그의 선원들은 필리핀 세부섬의 세부왕국에 별다른 저항 없이 도착하게 됩니다. 도착 후 먼저 탐사를 시작하게 되고, 이곳에는 향신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동안의 항해(약 1년 8개월)가 너무 힘들었기에 잠시 쉬어 가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때 마젤란 선단을 환대해 주었던 세부왕국의 왕(라자 후마본)과 왕비에게 가톨릭 세례를 해 주는 등 세부왕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던 중 마젤란은 세부 왕국의 왕(라자 후마본)과 막탄섬 왕(라푸라푸) 사이의 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라푸라푸가 세부섬 세부 왕국으로 무역을 하러 오는 배를 해적질하는 횟수가 잦아지자, 세부 왕국의 라자 후마본은 항상 라푸라푸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때맞춰 그 당시 최신 무기를 보유한 마젤란이 세부에 있던 것입니다. 결국 라푸라푸를 쳐 달라는 라자 후마본의 부탁을 수락한 마젤란과 그의 병사들은 1521년 4월 27일 세부섬 인근 막탄섬 앞바다에서 라푸라푸 군대와 치열한 전투(막탄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우세 할 거 같던 스페인 군대가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퇴각을 하는 과정에서 마젤란이 라푸라푸 군대에 잡혀 그만 전사를 하게 됩니다. 필리핀 세부섬 왕과 막탄섬 왕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다가 결국 마젤란만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튼 마젤란이 전사를 하게 된 뒤에 남겨진 스페인 선원들은 엘카노가 주축이 되어 부랴부랴 도망치듯이 세부섬을 떠납니다. 그 와중에 다른 섬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물어 물어서 결국에는 원래의 목적지였던 몰루카제도(향신료 제도)에 도착해 향신료를 구해서 스페인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젤란이 대장으로 시작했던 항해였는데 결국 마젤란은 중간에 사망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엘카노와 배 1척 만이 향신료를 가지고 스페인 본국으로 귀국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엘카노가 인류 최초로 지구 일주를 한 인물로 인류사에 기록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에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이라는 곳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은 필리핀에게는 크나큰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2. 스페인 식민지배 시대(1565년~1898년)
스페인 본국에 필리핀이라는 곳의 존재가 알려진 후에, 스페인에서는 본격적으로 필리핀을 식민지배 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서 필리핀으로 총 4번의 원정대를 사전 조사 차 파견 하게 됩니다. 필리핀의 사마르섬과 레이테섬을 발견한 어느 원정대 대장이 그 당시 스페인 국왕 이었던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의 이름을 따서 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 필리피나스 제도)라고 명명을 했습니다.
이 이름이 이후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배기에 전국으로 확산하여 오늘날 필리핀이라는 국가명으로 탄생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필리핀이라는 국가 이름이 그 당시 스페인 왕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 진 겁니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필리핀이라는 국가명을 개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종종 나오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 (Miguel Lopez de Legazpi, 1505? ~ 1572)
스페인 초대 필리핀 총독. 식민지 장관을 지내고 국왕 펠리페 2세로 부터 필리핀 원정대 대장으로 임명 받아, 필리핀 세부섬에 최초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마닐라를 점령,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몇 번의 원정대가 번번이 실패를 하게 되자 1565년에 필리핀의 국왕 펠리페 2세는 레가스피를 5번째 원정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배 5척과 500명의 군사를 지원하게 됩니다. 레가스피는 멕시코(그 당시 스페인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세부에 도착 후 세부 왕국을 점령하고 세부에 최초의 스페인인 거주지를 세우고, 루손섬 마닐라 지역으로 진출해 톤도 왕국과 마닐라 왕국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렇게 레가스피는 필리핀에 스페인 식민지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이후 레가스피가 사망하는 1572년까지 민다나오섬 남부 지역(이슬람 술탄국이 있던 곳)을 제외한 필리핀 전역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약 330년 동안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 지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화는 큰 저항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시 필리핀에 큰 정치 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필리핀인 들에게 스페인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서구 세력과 가톨릭의 신은 월등한 힘을 가진 권력자이자 새로운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은 가톨릭을 잘 활용해서 필리핀을 식민지배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스페인이라는 나라 자체가 가진 종교적 사명감이 다른 경쟁 국가인 포루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에 비해 매우 컸기 때문 인듯 합니다. 결국 스페인의 종교적인 노력이 필리핀을 330년 동안의 지배로 수천만 명의 신도가 있는 가톨릭 국가로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필리핀에는 향신료도 나지 않았고 돈 될만한 자원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에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그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와 필리핀 간의 중개무역 이었습니다. 중국 및 아시아 각 지역으로부터 필리핀 마닐리로 수입된 비단, 직물, 도자기, 약재, 면화 등을 멕시코에서 가져온 은 등을 이용하여 구매하여 다시 멕시코로 보내서 비싸게 재판매 하는 방식으로 많은 이익을 취했습니다. 이때 스페인의 범선인 갤리온(Galleon)선이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필리핀의 마닐라를 운항하면서 교역품을 날랐습니다.
이렇게 멕시코 아카풀코와 필리핀 마닐라 사이에서 진행했던 중개무역을 흔히 갤리온(Galleon) 무역이라고 합니다. 이 갤리온 무역을 진행 할 때 스페인 본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은 없었고 필리핀 내 천연자원의 착취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갤리온 무역도 남미에 있던 스페인 식민지들이 19세 경에 독립을 하게 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결국, 필리핀에도 광활한 토지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서 담배, 바나나, 그리고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플렌테이션 농장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플렌테이션 농장은 활발히 운영중 이고 막대한 부를 챙긴 스페인계 필리핀 토착 가문 및 중국 화교 가문 들은 필리핀의 지주로 군림하며 필리핀 토지의 70% 이상을 소유하며 경제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3. 스페인과 필리핀내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
스페인이 1565년 필리핀 세부를 점령한 뒤에도 필리핀 내에 있는 이슬람 세력은 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이슬람 세력 간의 모로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민다나오섬 서쪽 술루해에 있는 술루 술탄국은 19세기 들어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 그리고 싱가포르와의 교역으로 번성하면서, 1840년대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스페인은 술루 술탄국에 대해 1848년부터 국지적으로 공격을 진행하였고, 1878년에 강화를 맺었지만, 이후 민다나오 섬 공략에 착수했습니다. 스페인은 1880년대에는 민다나오 부아얀 왕국과의 전쟁을 격화 시켰는데, 식민지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스페인은 민다나오 섬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2020년인 지금도 민다나오 남부에 있는 이슬람 해방 전선과 필리핀 정부군 간의 전투로 계엄령이 선포 중입니다.
4. 필리핀의 스페인에 대한 반란과 민족주의
이미 16세기부터 18세기 기간에 스페인과 필리핀 민중들의 크고 작은 충돌이 많았습니다. 특히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7년 전쟁 때문에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이 필리핀에서도 발발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한때 영국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필리핀 민중들에게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각지에서 민중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잘 알려진 반란은 필리핀 비사야지역인 보홀에서 발생한 다고호이의 반란과 루손섬 팡가시난에서 발생한 델라 크루즈의 반란입니다.
16~18세기에 발생한 필리핀 민중들에 의한 여러 반란은 필리핀의 역사가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스페인 식민 지배에 필리핀 민중들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식민 지배 체제가 차츰 무너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19세기 필리핀 민족주의가 시작되면서 필리핀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5. 필리핀 독립 혁명
18세기 국가 간의 무역자유화에 따른 미국 및 영국과의 무역 확대는, 필리핀 내에 고등교육의 확대와 함께 19세기에는 자유주의 사상이 필리핀 국민에게 퍼지게 됩니다. 19세기 말이 되면서, 필리핀에 부유한 자들이 성장하고,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항로가 정비된 것 등을 바탕으로, 스페인으로 유학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중요성을 느낀 유학생 지식인들은 점차 스페인 정부에 대한 개혁 요구를 강화하여 필리핀 민족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필리핀의 지식인들은 스페인에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민족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호세 리잘과 마르셀로 델필라 같은 이들이 있었지만, 이 둘은 모두 스페인에 의해 처형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스페인의 강력한 진압은 더 큰 저항을 불러오게 됩니다. 민족 운동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하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에 의해 비밀 결사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무장 투쟁과 전쟁을 통해 필리핀의 독립을 추구하였습니다.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 되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역시 카티푸난에서 무장 독립 혁명 운동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필리핀 독립 혁명의 비밀 결사 단체인 카티푸난은 아기날도와 보니파시오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결국 보니파시오가 처형을 당하고 일사분란한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후 지속해서 스페인에 대한 투쟁과 전투를 진행했지만 뚜렷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 호세 리잘 (Jose Rizal, 1861~1896)
필리핀의 사상가. 스페인의 마드리드 대학에서 유학, 의학을 공부했다. 한편, 스페인에게 필리핀 식민지의 개혁을 요구하는 언론 활동에 참여하였다. 필리핀 혁명과 필리핀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기반이 되었다. 민족주의 비밀 결사단체가 일으킨 폭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공개 처형되었다.
6.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
다시 한번 필리핀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과 미국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쿠바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미국 사이에서 미묘한 관계가 지속하고 있던 1895년에 쿠바 독립 전쟁이 발발합니다.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지지하였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과의 마찰이 발생하게 됩니다. 쿠바 독립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898년에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미국의 전함 메인호가 의문의 폭침을 당하면서 미국은 쿠바 독립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이 필리핀에서도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에 전면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홍콩에 망명해 있던 카티푸난의 수장 아기날도에게 미군이, 필리핀으로 상륙할 때 지원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기날도는 이를 받아들였고, 1898년 5월에 미국 함대와 함께 필리핀으로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재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기날도는 같은 해 6월 12일에 루손섬 카비테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마침내 8월 13일 아기날도는 미군과 함께 마닐라에 있던 스페인 총독부를 함락시키고,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은 파리 조약을 체결하고, 스페인은 필리핀, 괌, 푸에프토리코를 미국에 2,000만 달러에 팔아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고 나라를 거래 한다는 게 제 상식에는 잘 와 닿지 않지만 참 슬픈 필리핀의 역사 입니다.
☞ 파리 조약 (1898년)
1898년에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강화 조약이다. 이 두 나라는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어진 전쟁을 벌여 미국이 승리를 하였다. 이 조약의 결과 스페인은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미국은 태평양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며 유럽 열강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스페인이 식민 지배를 했던 필리인의 역사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필리핀의 근 현대사인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필리핀 역사에 대해 포스팅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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