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스의 독재정치로 오랜 세월 시름 하던 필리핀에 새로운 시대가 올 수 있게 만들어준 필리핀 전 상원 의원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에 대해 포스팅해 보겠습니다. 흔히 필리핀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의 피살 사건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참고로 필리핀 사람들은 애칭으로 그를 니노이(Ninoy)라고 부릅니다.
※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Benigno Ninoy Aquino Jr. 1932~1983)
필리핀의 상원 의원과 탈락(Tarlac)의 주지사를 역임한 정치가. 미국에서 마르코스 독재 반대 운동을 하다 1983년 8월 21일 필리핀으로 귀국, 마닐라 공항 도착 직후 괴한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아키노 암살 사건은 필리핀 민주화 혁명(피플 파워 혁명)을 촉발시켜 마르코스 독재체제가 무너졌다. 그 결과 니노이 아키노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필리핀 역사 이야기] -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와 그의 부인 이멜다
탄탄대로였던 젊은 정치인 니노이 아키노
베니그노 아키노는 1932년 필리핀 루손섬 중부 탈락(Tarlac) 주 콘셉시온(Concepci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필리핀 초대 대통령인 아기날도의 혁명군에서 장군을 지냈고 아버지도 케손 대통령 참모로 일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필리핀 유력 가문에서 출생한 아키노는 아테네오 대학교를 중퇴하고 17세의 나이에 당시 필리핀 최대 신문사였던 마닐라 타임스에서 기자로 일하게 됩니다.
6·25 전쟁(한국 전쟁) 당시 필리핀 최연소 종군기자로 한국에서 취재를 했습니다. 종군기자로서의 능력이 탁월했던 아키노는 귀국 후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습니다. 이후 라몬 막사이사이 국방장관의 보좌관이 된 아키노는 공산주의 무장 게릴라인 후크 발라합의 지도자와 지속적인 물밑 교섭을 벌여 그를 정부에 투항하게 했습니다. 그 공을 인정받아 필리핀 정부로부터 2번째 훈장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니노이 아키노는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고, 1954년 22세의 나이로 고향인 콘셉시온(Concepcion)의 시장이 됩니다. 그리고 그 해에 훗날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는 코라손 아키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키노는 승승장구하여 1961년 29세의 나이로 탈락(Tarlac) 주의 주지사에 당선이 되고 1968년에 36세의 나이로 필리핀 상원 의원이 됩니다. 36세의 나이에 필리핀 상원 의원이 된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기록이라고 합니다.
반 마르코스 투쟁 그리고 암살 당한 니노이 아키노
상원 의원이 된 아키노는 마르코스 정권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마르코스 정부와 각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던 1972년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필리핀에 선포하며 독재체제를 구축할 무렵 야당 정치인을 탄압하며 처음으로 구속시킨 사람이 아키노였습니다. 당시 아키노는 살인, 불법 총기 소지 및 정부 전복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지만 형이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8년 여간의 수감 생활을 하며 아키노는 마르코스의 독재에 전면적으로 맞서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반독재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을 했고 반 마르코스 투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1979년쯤 필리핀의 경기 침체가 가속화되고 야당 의원들의 아키노 석방 요청의 공격 수위가 높아지면서 마르코스 정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거기에 오랜 수감 생활의 여파로 아키노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마르코스는 1980년 5월에 아키노를 미국에 치료차 보낸다는 명분으로 석방하고 아키노 가족의 미국 망명 요청을 수락합니다.
그렇게 미국에서 심장병 회복을 한 아키노는 3년 여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지속적으로 마르코스의 독재와 폭정에 대해 비판적으로 폭로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필리핀 귀국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미국 망명을 끝내고 필리핀으로 돌아가려 하자 측근들이 만류할 당시, 아키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The Filipino is worth dying for (자신이 믿고 있는 옳은 명분이 있는 필리핀 사람은 조국을 위해 죽을 가치가 있다."라고.
1983년 8월 21일 아키노는 차이나 에어 라인 편으로 타이베이를 거쳐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후 지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땅을 밟는 순간 숨어있던 괴한의 총에 머리를 맞고 바로 현장에서 즉사를 합니다. 아키노를 암살한 범인은 롤란도 갈만이라는 자로 밝혀졌는데 아키노를 암살한 뒤에 현장에 있던 경찰과 군인의 발포로 바로 사망하게 됩니다.
암살범인 갈만이 죽었기 때문에 아키노 암살의 배후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습니다. 마스코스 대통령 배후설이 가장 가능성이 컸었고, 미국 CIA 개입설,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의 배후설, 필리핀 공산당 배후설 등등.. 그러나 정확한 배후는 미국 대통령 J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과 같이 아직까지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필리핀 국민들이 슬퍼하면서 아키노의 장례식은 엄숙하고 차분하게 잘 치러졌습니다. 이후 매년 8월 21일은 니노이 아키노 데이(Ninoy Aquino Day)로 국가 공휴일로 지정해서 아키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암살된 마닐라 국제공항의 이름이 니노이 아키노의 이름을 따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NAIA,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변경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니노이 아키노의 암살 이후
니노이 아키노의 장례식 이후 수도 마닐라를 포함해서 필리핀 전역에서 일반 민중에 의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게 아키노 암살을 다룬 해외 언론의 다큐멘터리가 필리핀 내에서 많이 유포된 것도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해외의 언론들도 일제히 마르코스와 이멜다의 독재정치, 부정부패 그리고 사치에 대해 비중을 높여 연일 보도하자 필리핀 내에 마르코스에게 불리한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마르코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선거를 통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어 역풍을 없애려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이후 야당 진영의 대통령 후보로 암살당한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급 부상하게 됩니다. 고민하던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고 전국을 돌면서 반 마르코스를 외쳤고 국민들은 코라손 아키노를 적극 지지하게 됩니다.
1986년 필리핀 대선 결과 필리핀 선관위는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발표하였으나 , 부정 선거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마르코스의 당선이 국민적인 여론과 맞지 않는 것이어서 다시 한번 필리핀 민중들과 가톨릭 교단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시작 되게 됩니다. 이게 그 유명한 필리핀 민주화 혁명(피플 파워 혁명)입니다. 마르코스는 군부에게 시위 진압을 요청하지만 군부도 결국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리고 맙니다.
※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 EDSA Revolution. 1986)
1986년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몰아낸 민주화 혁명이다. 대한민국의 4.19 혁명처럼 독재 정권을 몰아낸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EDSA(Epifanio De los Santos Avenue)는 마닐라에 있는 도로 이름이고 그 도로에서 혁명이 진행되어서 그렇게도 부르고 있다.
결국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들은 쓸쓸히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가게 되고, 결국 코라손 아키노는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새로 취임하게 되며, 21년간의 아주 길었던 마르코스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게 됩니다. 영향력 있던 한 명의 정치인이 사망 함으로 필리핀의 민주주의가 부활했다는 점이 조금 씁쓸하지만, 그 사건이 만약 없었더라면 마르코스 일가의 독재 정치가 더 길게 지속되어서 필리핀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필리핀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의 피살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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